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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문화찾기/천소영/한국문화사/고유어 어원에 담긴 한국문화

우리는 자신이 지닌 가치관이 드러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며, 말하는 대로 행동하고, 그 행동들은 모여서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또한 언어의 순서와 표현에 따라 나라마다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어떤 나라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기위해서는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동의어 수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뭔가를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단어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와 우리의 사고방식 및 가치관은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언어만으로 한 국가의 국민성을 완전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언어를 통해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말과 언어가 우리 개별과 국가의 정체성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말의 문화 책에서 나온 것처럼, 문화라는 개념 속에 언어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언어는 무엇보다 문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첫 번째 요소다. 언어를 빼놓고는 문화를 운위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언어 속에는 그 언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정서나 사고방식, 의식구조 등이 용해되어 있다고 한다. 언어가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한민족이 쓰는 한국어에는 한국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말은 인간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자, 느낌과 기분을 가시적으로 그려 내는 그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한국인은 생각을 담는 그릇인 고유의 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말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 곧 고유문자로서의 한글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 빠르게 문화가 변하는 시대에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우리말의 파괴는 정말 막아야 하는 것인가. 시도 때도 없이 줄임말을 사용하고 영어와 섞어서 사용하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제3의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계층별 은어는 과도하게 쓰면 문장이 이해하기 어렵고 쓸데없이 외래어가 많이 들어가 있어 읽는 것 자체에도 거부감이 들며, 소통을 어렵게 하며 불쾌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좋게 보면 한글의 장점을 살리고, 언어생활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말이 생기고 사라지는 건 원래 언어의 숙명이기도 하다, 과거의 문화가 바뀌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어휘들이 삭제되고 생기고 의미가 확대되고 축소되고 전이되면서 조상의 삶의 태도와 생활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 삶의 흔적이 새겨지고 있다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우리말 파괴에 심각성을 지적하는 것의 원인은 공감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성적으로 우리말 파괴에 대해 고민을 한 것이 아닌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언어 특히 한국말의 신비로움을 이용해 잠깐의 재미 또는 잠깐의 흥밋거리를 찾고 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과거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심각한 외래어 남발과 한국어의 변형이 없었다는 것이다. 언어가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에도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렇게 말을 변형해서 하는 것을 계속 내버려 두는 것이 괜찮을까싶다. 단순히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이상하게 바뀌어버린 우리의 언어습관이 세대 간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나중에는 부정적인 행동과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칠까봐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진정 우리말 파괴에 대한 이런 심각성을 인식하려면 이런 흥밋거리에 가려진 우리말 파괴에 대해 진지하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늘 변하기 마련이고. 그 변화의 시도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늘 있었다. 이게 기존의 것과 다르다 보니까 파괴로 느껴지기 쉽지만, 완전히 배척하기 보다는 어느 정도 한계를 설정하면서 하나의 문화적 형태로 보고 새롭게 변화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기 위한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언어는 그 문화에 속한 사람을 자유롭게도 하고 구속하게도 하는 영향력을 가지는 만큼, 우리가 사회를 영위하고 문화인 생활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인 언어를 소중하게 여기고 활용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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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역사와 신화/자크브로스/양영란/갈라파고스

식물의 모든 것에 대해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자세하게 보여주는 이 책은 식물에 관련된 여러 신화에 대해 소개하고, 식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도 제시하고 있다. 식물에 대해 다룬다기보다, 식물에 대한 인식의 역사를 다룬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식물의 역사로 식물 자체만을 두고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었고, 식물을 이런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선했다. 식물이 없다면 어떤 음식물도, 어떤 동물도, 어떤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이해하면서, 최초의 지구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 조류의 탄생과 식물의 진화, 생명체를 가능하게 한 광합성 작용, 식물의 교묘한 생존 전력과 뛰어난 적응력, 식물이 지닌 숨겨진 정중동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자크 브로스는 수목학과 신화학을 아우르는 풍부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선사시대 이래 인간과 식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려준다. 태고 적부터 인간은 탄생과 죽음, 부활을 반복하는 식물에 대해 경외심을 지녔다. 하지만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은 식물의 신성한 의미를 잊어버렸으며, 그 결과 인간과 식물의 조화가 깨어지고, 인류는 각종 환경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제야 식물이야말로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또한 예전부터 내려오던 식물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믿음은 엄정한 과학주의가 판치던 시기에 미신으로 치부되어 무시되었지만 현대 과학에 의해 다시금 입증되기도 했다. 이 책은 약간은 지루했지만, 식물에 얽힌 종교적, 신화적 의미를 통해 인간과 식물이 함께해온 기나긴 역사와 식물의 능력을 접하면서, 식물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시야를 얻을 수 있었고, 식물에 대한 사랑과 공경의 자세를 곳곳에서 느끼고 식물과 인간은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육체가 지닌 궁극적인 목적은 식물세계의 번성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 책의 에너지 효율 측면이나 여러 가지 환경에의 적응 측면에서 동물보다 식물이 월등하게 우수한 생명체라는 주장은 식물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식물도 생존경쟁이 치열하고 개체마다의 생존의 법칙을 갖고 있으며 그 법칙을 발전시켜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식물은 그들의 번성에 동물은 물론, 인간을 활용하기도 한다. 식물이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자신의 생존과 번식 욕구를 충족해 왔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과연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최종소비자가 맞는지 고민해보고 새로운 관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잠시 입장을 바꾸어 식물의 위치에서 먹이사슬을 그린다면 당연히 그 정점에는 식물이 자리할 것이다. 결국 지구상의 먹이사슬은 단선적이 아니라 순환적인 구조로 상호 연결되어 있어서, 지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식물과 동물과 인간은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존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현대인의 식물에 대한 이해는 식물을 자원으로 이용하는 데 있어서 그 깊이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 폭은 오히려 훨씬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옛날 원시인들이 어떻게 차, 커피, 카카오, 콜라열매, 파라과이차 등 카페인을 함유하고 있는 다섯 가지 식물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또 카페인 성분이 피로를 몰아낸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서구의 근대 또는 현대 문명이 이해하지 못했던, 우리가 원시인이라고 부르는 선조들의 식물에 대한 광범위하고 기초적이지만 상세한 지혜와 지식에 대한 탐구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어떻게 우리가 자랑하는 현대 문명이 그 많은 실험과 연구 끝에 간신히 알아낸 식물들에 관한 지식을 알아내고 활용할 수 있었을까. 현대인들이 상실한 식물들과 사람들 간의 교감 능력이 그 답일 것이다. 식물은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한만큼, 식물을 연구하여 식물과 무생물 생물 나아가 인간까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식물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고 무관심했던, 식물에 대한 정보와 신화를 읽으면서. 생명과 식물을 사랑하고 환경에 대한 인간의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은 이 책에 덧붙일 수 있는 소중한 미덕인 것 같다. 우리의 고정 관념과 상식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을 서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루면서 분리하지만, 실제 적지 않은 실험과 사례는 우리가 가진 상식과 많이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오만함과 자연에 대한 파괴행위로 더 이상 지구의 생명체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모두가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남기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꾸려면 있는 그대로의 생명,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생명 그대로를 사랑하고, 적어도 존중할 수는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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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동의보감연구/김호/일지사

이 책은 동의보감 편찬의 사회적 배경으로 조선전기의 향약론과 역병발생 및 대책을 설명하고, 조선왕족실록의 자료를 분석하여 16세기 기후의 불균형과 역병 사이에 높은 상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후기부터 계속된 향약 장려 정책인 향약론의 전개 과정을 통해 허준이 말하는 조건 구래의 의학 전통이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허준의 생애와 동의보감의 관계를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전란을 겪고,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도 치료하면서 허준은 백성들의 삶을 깊이 관찰했다. 무엇보다 허준의 생각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지 않게 미리 알려주고 싶었고 질병, 증상에 대한 약은 나중에 알려줘도 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리고 병이 안 걸리도록 하는 것은, 당연히 몸을 잘 지키고 병을 예방하는 것이 병 걸린 후 치료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환자에게는 질병이 오는 것의 근원을 알려줘 미리 대비토록 하며, 의사에게는 그 덕목을 환자에게 알려주라 한 것이지 않을까. 허준은 무수히 많은 처방의 요점만 간추리며, 국산 약을 널리, 쉽게 쓸수 있도록 조선인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표현했다고 한다. 시골에는 약이 부족해 주변에서 나는 약을 써야 하는데 그게 어떤 약인지 모르기 때문에 시골 사람들이 부루는 약초 이름을 사용한 것과, 또 인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해 질병 이전에 사람이라는 근본을 보도록 가르친 내용들을 보면 그가 국민의 건강과 정신을 책임지고 그들을 많이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서자로 태어나 엄청난 출세 길에 오른 허준은,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며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임진왜란 공신 책봉에서 3등에 책정되며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으나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유배됐다가 돌아온 뒤에는 권세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조용히 삶을 마쳤다. 이를 보면, 의관 허준은 매우 극적인 삶을 살았고, 그의 출세는 조선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주변 양반들의 수많은 시기 질투 모함이 있었겠지만 이는 오로지 그의 의술과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을 것이다. 허준은 어려서부터 총민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해 경전과 사서에 두루 밝았고 의학에는 더욱 정통했으며, 서자출신임에도 기죽어지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기의 권한을 행사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을 보고 그의 머리가 좋고 행동과 판단이 빠르며 지식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의 목표에 대한 열정과 다소 과감하고 솔직했던 행동, 사고방식은 꼭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오래전부터 동의보감이란 책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큰 관심이 없어서 무슨 내용인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디에 쓰이는지 알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수업시간에 하는 동의보감 수업을 이해해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선정했다. 역사와 관련된 지식이 전혀 없어서, 읽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내용이 많아 참 많이 힘들었고, 수업 때 들었던 내용들이 나와서 그 부분은 약간의 흥미로 읽었지만 모르는 내용을 찾아보고 검색해보며 이해하느라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동의보감은 동아시아와 세계의학사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평가를 받는데, 내가 아직 그 가치를 잘 몰라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선의 의학을 알고 한의사로서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허준의 동의보감을 정복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환경에 인구밀집 현상으로 다양하고 더 강력한 전염병이 발생했고 우리는 이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는데, 예전에는 이러한 전염병 및 역병이 돌면 어떻게 대처 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허준이 살았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은 잦은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시기였으며, 이상 기후 현상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역병이 창궐하면 나라에서는 아주 기민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처럼 일반인들이 병원을 쉽게 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나라 차원에서 의사를 파견해서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역병 대처 방법을 보고 생각이 든 것이 있다. 지금은 기후가 변했고 먹는 음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분명히 예전의 치료법이 현재의 병에 그대로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으로 질환을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전체의 문제로 보고 행동해야 하며, 끊임없이 신속하게 연구를 하고 모든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면 빠른 시간 내에 질병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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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선택할 권리/M, 스캇펙/조종상/율리시즈

 

이 책은 중반까지는 읽어도 계속된 저자의 불확실한 의견 때문에 안락사의 지지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스스로 끝낼 수 없으니,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안락사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안락사 운동이 세속적 현상에서 생긴 것으로 보고, 영혼의 성장을 독려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영혼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은 모두 구체적인 현실이지 추상적이고 고상한 개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읽으며 공감하고 나와 같은 의견도 여러 번 나왔지만,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을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하고 떠나려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삶의 문제에 대한 고통을 이겨내면서 배우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저자의 생각이 완전히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고통의 과정 속에서 얻는 배움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여기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성인군자도 아니고 모든 것을 배우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고귀한 배움이기에 그렇게 큰 고통을 감수하면서 까지 이겨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저자의 말대로 죽음도 삶의 과정 중 하나인 것은 동의하지만,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안락사를 자처하는 것이 자살과 같은 죄로 여길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완전한 종교적 신념에 휩싸여 글을 쓴 것만 같았고, 하나님이 주신 육체라는 그 믿음의 이유 때문에 인생의 종착지점이 망가질 필요는 없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감히 타인의 인생전체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온 만큼 앞으로도 죽음과 안락사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변하리라 믿는다. 현재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옳다 그르다 이분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나는 그 경계는 아주 모호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난치성 질환의 치료과정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현재 상태가 극히 치명적이라면 인위적인 생명 유지 장치와 과도한 의료조치를 중단하는 것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연하게도 위험한 비탈길에서 말하는 바와 달리 조력자살을 하나의 권리로 인정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가통증조절기처럼 내 몸의 문제를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은 환자에게 커다란 심리적 안정감을 심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PCA가 안 되는 약물 사용에서 환자의 심리적 불안감과 함께 고통이 배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치명적 고통의 환자에게 의사의 역할은 완치가 아니라면 적어도 통증은 줄여줄 수 있어야 하지만, 관료제에 따라 대형병원에서는 아무리 아프고 죽어가도 원무과부터 차례대로 접수하라고 하며, 고통스러워 진통제를 요구하는데도 아직 주사시간이 아니라며 그냥 지나쳐간다. 의사의 입장에서 안락사, 보호자의 입장에서 안락사, 환자의 입장에서 안락사는 모두 다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라 본다. 생사를 판단할 때는 감히 다른 사람의 삶의 질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더욱이 환자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육체적인 문제만을 바라보며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의식이 없어서 말을 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생명의향서를 쓴다한들 마지막 선택의 상황에서 실제로 그 사람의 선택이 변함없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또한 가족과 의사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에, 이 종이가 나의 선택을 100% 지지해준다고 볼 수도 없다.

말기 암에 대한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은 과도한 조치,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지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는 그리 크지 않다. 완치를 위한 고통스런 과정이라면 견뎌내고 받아들일 사람들은 많겠다만, 일시적인 효과뿐이라면, 그저 환자를 통해 매출을 내기 위한 대형병원의 역겨운 만행이라면, 환자는 수명연장 10%와 거대한 고통을 정말 바꾸려고 할까. 안락사에 대한 토론도 하고 인간 존엄사에 대한 기사도 많이 읽어봤지만, 책을 읽으면서 실제로 자신의 경험사례를 나열한 것을 보며 새롭게 생각해보고 느끼게 된 점도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었고, 나의 마지막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한번 상상해보면서, 사고사가 아닌 한 사랑하는 사람들과 죽기 전에 서로 인사하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령화 시대에서 우리의 건강은 마냥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해 건강한 식습관을 만들고 꾸준한 운동을 하며 내 몸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상이라는 말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용될 것인지 아니면 안락사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바뀌면서 시대 흐름에 맞춰 다르게 사용될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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