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1. 향약의서의 편찬 이유(목적)13, 14, 15, 17, 20세기의 정치, 사회, 문화적 시대 배경과 연관지어 설명하시오. (그 시대에 왜 등장했는지 정치, 사회, 문화적 시대 배경과 관련지어 설명) [1]

 

13c

몽고와의 전쟁 중 대장도감에서 향약구급방간행, 전쟁에 대비한 자급자족 목적

대장도감은 강화도에서 대장경을 간행하여 부터의 힘으로 몽고를 물리치려고 한 고려 왕실의 의지가 담긴 관청이다. 향약이 출판될 때는 항상 전쟁이 있었다. 1633년엔 후금, 청나라/ 1942년엔 태평양전쟁

1231-1270년 사이에 고려와 원의 전쟁이 있었다. 향약집성방은 전쟁중인 1236년에 설치된 대장도감이라는 기관에서 출판되었다. 대장도감은 대장경을 간행하여 부처의 힘으로 몽고를 물리치려고 한 고려 왕실의 의지가 담긴 관청이다. 전쟁 중에 전쟁 상대국으로부터 약재를 수입하여 의료를 시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적군을 물리치기 위한 기관에서 출판된 책이라면 간행 목적은 분명했다. 한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본초 자원으로 전쟁을 극복해보려는 의학서적이었다. 때문에 한국 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주로 활용하였던 지역의학의 모습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4c

국가재정에 도움되기 위한 목적, 검소한 생활하며, 사치와 귀천의 구별을 금지했고, 외국물건 사용금지했음. 세금을 징수하고,동철기 대신 자기나 목기 사용함

14세기 접어들면서 상황이 많이 바뀐다. 원과의 전쟁보다는 원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에 편입하면서 향약의학은 14세기 말 왕조 교체기에 다시 주목받게 된다. 이 시기 방사량이라는 인물은 고려와 조선의 의학사정책에 깊이 관여했으며, 왕조의 재정 안정을 통한 왕권 강화를 주장했다.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 고가의 물품 사용을 금지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으로 하는 것으로 왕조의 재정 안정을 도모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의학관료인 방사량은 조선 왕조의 개국과 함께 국가 의료체계와 의료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향약을 강조했고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에도 관여했다.

 

15c

국가의료체계 목적, 세종이 향약집성방 간행/ 지리지 집필하여 약재 포함한 모든 생산품 조사하여 세금 징수/지역에 의사 파견. 의학교육 장려/ 약재 감별. 자생하지 않는 약재 재배 시도, 저귺적으로 송원명 의학과의 교류 시도, 지역의 약재를 지역에서 활용하는 국가 의료체계 확립/ 향약의학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이에 부응하는 국가적인 의료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한다.

한국의학에서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손꼽는 두권의 의서(향약집성방, 의방유취)10년의 터울을 두고 같은 세종의 체제에서 탄생했다. 15세기 조선왕조에서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하려는 시도를 하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문제의식 속에서 의학 및 의료기술을 발전시켰다.

 

17 c

향약집성방은 16세기 이후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과의 전쟁을 3년 앞둔 1633년과 2차세계 대전 중인 1941년에 재출판을 하게 된다. 13세기 원과의 전쟁 중에 향약의학이 강조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비하여 출판된 것이다. 특히 1940년대는 한약재를 배급으로 나누어주는 등 물자사용을 강력히 억제하던 시점이다.

 

+@) 13~15세기는 향약을 주로 사용하려는 향약의학의 시기이자 국내산 약재를 활용하려는 지역의학과 해외 의학지식이 적극적으로 융합된 시기이다. 전쟁대비, 국가재정이익, 국가의료체계 확립/ 15~17세기는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하는 시기,17~19세기는 한국의학의 독자적 발전기, 20세기는 아시아전통의학 및 서양의학과의 교류기/ 16세기 이후 향약만 활용하는 향약의학은 쇠퇴하지만, 향약을 꾸준히 활용하는 전통을 계승

 

*시대구분을 하면 1. 대표 저술을 통해 가장 중요한 내용을 포괄가능. 2. 중의학과 차이를 잘 드러내며, 3. 기존의 한국의학사 서술에 드러나 있는 역사관의 문제점 파악가능

 

-----------------------------------------------------------------------------------------

2. (1)조선시대의 의학교육에 대해 설명하고, (2)세종(15c)의 의약제도의 특징을 설명하시오. [5]

 

 

세종은 유학 중심의 국가체계를 확립했고 한글을 창제함. 유명유학자들인 고위직 관료들이 의학서적의 편찬을 주도하면서 강목체(綱目體)로 서술했고, 성리학의 이상을 실천하는데 활용했다. 조선 세종은 향약집성방을 통한 국가의료 체계의 완성 및 의방유취를 통한 학문적 성취를 동시에 달성했다.

 

-----------------------------------------------------------------------------------------

3. (1)동의보감이 18세기 조선 의학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고, (2)중일의학과 다른 점에 대해 서술하시오.

 

16~15세기 향약의학이나 15~16세기 의학종합의 시기 모두 중국과 의학적 교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동의보감 출간 이후 한국의학은 주변 국가와의 의학교류보다는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첫째, 황제내경, 상한론, 난경, 신농본초경 등이 가진 의학경전의 지위를 동의보감이 대신한다. 둘째, 동의보감이 의학경전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년간 동의보감에 따라 한의학의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셋째, 의서의 서술과 의학 공부법에 있어서 실용적인 방법을 택한다. , 조선의 의서들은 이론을 논하는 것보다는 질병을 서술하는데 힘을 쏟았고, 조선왕족실록과 동의보감집례에는 의학을 공부할 때 본초를 먼저 공부하라고 했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실질적으로 서구 사회와 교류를 시작한 국가이다. 19세기 후반 공식적인 교류가 시작되었지만 곧바로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16세기에도 서구 사회와 다양한 교류를 했던 중국이나 일본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따라서 서구사회와 늦게 교류를 시작하면서 중일 전통의학에 비해 그만큼 늦게 근대화된 연구방법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근대화의 물결에 덜 오염된 전통의학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의보감의 영향으로 전염병의 종류에 따라 다른 대응방법을 택하였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온병학이 크게 발전하고, 일본에서는 상한론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상한과 온병으로 전염병에 대응하는 방식은 전염병에 대한 정형화된 변증과 처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정착되어 있는 국가의 전염병 대응체계와 각기 다른 전염병에 대해 다른 치료방법으로 대응하는 전통을 고수하였고, 상한이나 온병에 대한 연구가 유행하지는 않았다. 특히 유럽인들이 가장 늦게 상륙한 곳이 한중일 삼국 중 한국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염병은 중국이나 일본과 양상이 매우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또 질병의 요인을 인체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으려는 전통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4. 한약분쟁의 성취(의의)를 세 가지 이상 설명하고, 현대 의료에까지 끼친 영향에 대해 서술하시오.

1994년 유일한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한의학 연구원 설립, 중앙정부 내 한의약전담부서 설치, 1995년 한약학과 설치, 1998년 전국 보건소 내 한방공중보건의 배치, 2003년 한의약육성법 통과, 대통령 한방주치의 임명, 2007년 국립대학교 내 한의학전문대학원 설치

 

국가의 지원이 보다 활발하게 되자 한의과대학에 상위1% 이내에 해당되는 우수한 인재들이 입학하게 되어 전세계 전통의약분야 종사자들 중 가장 우수한 인재풀을 갖게 되었다. 젊고 유능한 한의사가 대폭 늘어남과 동시에 젊은 한의사들의 취업 문제가 벌어지는 등 세대간의 갈등도 대두되고 있다.

 

 

 

 

-----------------------------------------------------------------------------------------

5. 1900년 광제원 의사규칙에 대해 설명하고, 현재의 의학 제도와 비교하시오.

일제가 권력을 장악하기전인 1900년 발표된 의사규칙에서는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을 배운 모두를 의사로 규정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조선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전통의학을 배운 의사들은 국립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게되었다. 일본의회에서 전통의학을 국가 의료체제에서 배제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단기간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서양의사를 배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913년 의생규칙을 발표했다. 전통의학으로 식민지 백성들에 대한 의료체계를 분담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서양의사를 의사로 동시에 전통의사는 의생으로 부르게 하여, 양의사와 한의사의 지위가 선생과 학생의 관계처럼 신분의 차이가 생겨났다. 한국에서 양의사와 한의산의 반목의 불씨는 이때부터 시작했다. 전통의학에 대한 불평등한 정책은 교육에도 반영되어 1945년 해방될 때 까지 대학교육에 전통의학은 포함될 수가 없었다. 다행히 1951년 대한민국 국회는 한의사제도를 국가의료체계 안에 포함시켰고, 1952년에는 현재의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한의학 전문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1972년 원광대학교가 뒤이어 설립되면서 현재는 11개의 사립대학과 1개의 국립대학교에 한의과대학이 존재하며, 3개의 사립대학교 내에 한약학과가 설치되었다.

-----------------------------------------------------------------------------------------

6. 한의계의 사대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식민사관이 무엇인지 예시를 들어 서술하시오.

사대주의

근대화를 지상과제로 삼던 시대에 서양의학의 입장에서 한의학을 해석하려고 했던 미키사카에와 김두종이 쓴 책에서, 전통의학의 긍정적인 측면보다 불합리한 측면이 강조되었다. 이런 시각은 김두종에게서 더 뚜렷하다.

미키사카에는 한국의학을 주로 중국의학을 도입하는 과정으로 기술했다. 김두종은 의학지식이 중국으로부터 건너왔지만, 몇몇 약재들이 중국에 수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여러 학자들은 의학지식의 상호전달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동아시아 의학사를 조명한다. 류장화는 중국은 한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 국가들로부터 다양한 의학기술을 받아들여 현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정금색은 중국으로부터 여러 의학 서적과 지식이 한국으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한국에서 자생하는 우수 약재들에 대한 의학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일부 서적이 중국으로 건네져 주변 국가들의 의학지식이 중국의학에 많이 포함되었다고 했다.

 

식민사관

미키사카에는 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수많은 한국의서들을 직접 참고하여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라는 한국의학서를 썼다. 이후 모든 한국 의학사는 그의 연구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충실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역사관을 벗어나기 어려운 때였다. 결국 미키사카에의 저술은 식민사관이라는 멍에를 의학사에까지 끌고 왓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김두종도 [한국의학사]를 저술했는데, 식민사관에서 벗어난 한국의학사를 기술하려고 애를 썻지만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

7.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의 SWOT를 분석하시오. [10]

S(강점)

W(약점)

O(기회)

T(위협)

-----------------------------------------------------------------------------------------

8. “여성 인력 20% 확대 한의계는?” [10]

현재 정부에서 공공기관의 여성 인력을 20%까지 할당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민족의학신문의 통계자료를 보면, 한의계의 여성인력은 그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통계자료를 고찰한 바 한의계가 노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설하시오. (여백 많음. 하고 싶은 말 다 쓰면 점수 잘 주신다 하심.)

-----------------------------------------------------------------------------------------

9. 각자 조별과제의 (1)소재, (2)문제의식, (3)주제문을 적으시오.

 

 

 

-----------------------------------------------------------------------------------------

10. (1)동의보감 목차를 적고, (2)인체를 내외로 구별한 기준에 대해 설명하시오. [5]

 

 

 

 

내경편과 외형편은 인체 안과 밖을 나누어 질병을 분류하고 있다,

입을 벌려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목구멍까지를 외형으로 넣었는 점과 피부 밑의 근육, , 힘줄, 뼈를 인체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라고 본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이것은 인체 내부의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인체 외부의 몸상태에 영향을 주고 드러난다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인체관을 좀 더 명확히 기술한 것이다. 인체의 외형의 증상과 관련된 인체 내경의의 문제를 찾아야 하는 것이 <동의보감>에 표현된 동아시아 의학의 주된 흐름인 것이고, 또한 외형보다 내경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한의학의 인체관인 것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황제내경의 기원/위쯔한/김기왕/일중사

한의학을 앞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원전을 공부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입학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왜 이런 옛날 원전을 읽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한의학의 현대화 과학화를 주장하면서 왜 고서에 머물며 우리가 이를 외우고 공부해야하는 것인지 답답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의학 본래의 목적인 질병의 치료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 의학사 시간을 통해서 조사를 해본 적도 있다. 현재 한의학을 비호하는 사람들은 고서를 읽으면서 공부하는 한의학의 표준화 되지 않은 용어나 현대 의학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지금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문제들을 원전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원전은 왜 필요한 것이고,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 알아보려는 의도로 책을 읽게 되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보면 어떻게 이렇게 신기한 의술들이 한참 오래전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이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러한 기술들을 접하고 익히게 된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서양의학의 역사를 소개한 책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발견을 할 때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지만, 한의학의 침술이나 탕약처방에 관해서는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의 치료법으로 다듬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수많은 이론들이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이론을 확립해나갔는지 호기심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서양에서는 해부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의술을 펼쳐나갔는데 왜 동양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의술이 발전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아주 근본적으로 책이 왜 쓰이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알면, 그 목적을 이해하고 필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유래를 설명하긴 하지만 내가 얻고자 하는 바를 가져다주진 않았던 것 같다. 한편, 원전을 번역한 번역서를 보다보면 원저자의 의도가 제대로 들어간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학파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제외하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기술하기도 하고, 증상의 한사심복처럼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단순히 단어만 표현해서 의미가 왜곡되기도 한다. 그래서 원전의 실질적인 필요성을 찾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우선 원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라도 하려면 번역서를 통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원저자의 의도가 곡해되지 않도록 출판본 그 자체를 우선적으로 보고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전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원저자의 의도를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원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내가 원전을 읽는다고 해서 제대로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책을 보면서, 내경이 어느 순간 온전하게 작성된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 추측을 하면서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며 내용이 변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편과 권을 시대에 따라 다르게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영추와 소문이 황제내경과 같은 책인가라는 물음이 생겼을 때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지어진지 오래된 책인데 아직도 이렇게 연구가 안 되었나싶으면서도, 개념의 문제로 인해 역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서술하면서도 계속 문제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가 공부한 한의학의 기초이론은 순수하게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란 것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반드시 원전이 옳은 것도 아니고 설령 원서로 학습을 하더라도, 원서 역시 많은 편집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수정되고 추측하면서 본래 뜻이 이미 바뀌어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하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부 경험적 발견이나 과학적인 발견도 포함되긴 했지만. 비과학적인 내용이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던 것처럼 원전이라고 다 옳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든 생각은 물론 고대의 해부 지식이 현대의 해부학적 개념과 갗이 명료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는 있겠지만, 원전은 한의학 분야의 기초가 되고, 과거와 현재의 교량역할을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 배울 여러 이론의 이해를 돕는데 사용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경험과 배경지식에 따라서 원전은 중요하다는 말이 참이 될 수도 거짓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전을 통해 언제까지 어떤 치법이 활용되었고, 지금도 유효한 기술인지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한의대를 다니면서 원전과 의학이 어떤 관계인지 계속 고민해야 두 학문이 공존하는 의의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의학을 배우면서 과거는 신뢰하기 어렵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현대 학문의 자세인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론과 사건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할 것 같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