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신이 지닌 가치관이 드러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며, 말하는 대로 행동하고, 그 행동들은 모여서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또한 언어의 순서와 표현에 따라 나라마다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어떤 나라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기위해서는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동의어 수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뭔가를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단어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와 우리의 사고방식 및 가치관은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언어만으로 한 국가의 국민성을 완전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언어를 통해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말과 언어가 우리 개별과 국가의 정체성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말의 문화 책에서 나온 것처럼, 문화라는 개념 속에 언어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언어는 무엇보다 문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첫 번째 요소다. 언어를 빼놓고는 문화를 운위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언어 속에는 그 언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정서나 사고방식, 의식구조 등이 용해되어 있다고 한다. 언어가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한민족이 쓰는 한국어에는 한국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말은 인간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자, 느낌과 기분을 가시적으로 그려 내는 그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한국인은 생각을 담는 그릇인 고유의 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말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 곧 고유문자로서의 한글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 빠르게 문화가 변하는 시대에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우리말의 파괴는 정말 막아야 하는 것인가. 시도 때도 없이 줄임말을 사용하고 영어와 섞어서 사용하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제3의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계층별 은어는 과도하게 쓰면 문장이 이해하기 어렵고 쓸데없이 외래어가 많이 들어가 있어 읽는 것 자체에도 거부감이 들며, 소통을 어렵게 하며 불쾌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좋게 보면 한글의 장점을 살리고, 언어생활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말이 생기고 사라지는 건 원래 언어의 숙명이기도 하다, 과거의 문화가 바뀌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어휘들이 삭제되고 생기고 의미가 확대되고 축소되고 전이되면서 조상의 삶의 태도와 생활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 삶의 흔적이 새겨지고 있다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우리말 파괴에 심각성을 지적하는 것의 원인은 공감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성적으로 우리말 파괴에 대해 고민을 한 것이 아닌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언어 특히 한국말의 신비로움을 이용해 잠깐의 재미 또는 잠깐의 흥밋거리를 찾고 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과거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심각한 외래어 남발과 한국어의 변형이 없었다는 것이다.
언어가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에도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렇게 말을 변형해서 하는 것을 계속 내버려 두는 것이 괜찮을까싶다. 단순히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이상하게 바뀌어버린 우리의 언어습관이 세대 간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나중에는 부정적인 행동과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칠까봐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진정 우리말 파괴에 대한 이런 심각성을 인식하려면 이런 흥밋거리에 가려진 우리말 파괴에 대해 진지하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늘 변하기 마련이고. 그 변화의 시도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늘 있었다. 이게 기존의 것과 다르다 보니까 파괴로 느껴지기 쉽지만, 완전히 배척하기 보다는 어느 정도 한계를 설정하면서 하나의 문화적 형태로 보고 새롭게 변화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기 위한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언어는 그 문화에 속한 사람을 자유롭게도 하고 구속하게도 하는 영향력을 가지는 만큼, 우리가 사회를 영위하고 문화인 생활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인 언어를 소중하게 여기고 활용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노력해야겠다.
이 책은 동의보감 편찬의 사회적 배경으로 조선전기의 향약론과 역병발생 및 대책을 설명하고, 조선왕족실록의 자료를 분석하여 16세기 기후의 불균형과 역병 사이에 높은 상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후기부터 계속된 향약 장려 정책인 향약론의 전개 과정을 통해 허준이 말하는 조건 구래의 의학 전통이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허준의 생애와 동의보감의 관계를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전란을 겪고,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도 치료하면서 허준은 백성들의 삶을 깊이 관찰했다. 무엇보다 허준의 생각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지 않게 미리 알려주고 싶었고 질병, 증상에 대한 약은 나중에 알려줘도 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리고 병이 안 걸리도록 하는 것은, 당연히 몸을 잘 지키고 병을 예방하는 것이 병 걸린 후 치료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환자에게는 질병이 오는 것의 근원을 알려줘 미리 대비토록 하며, 의사에게는 그 덕목을 환자에게 알려주라 한 것이지 않을까. 허준은 무수히 많은 처방의 요점만 간추리며, 국산 약을 널리, 쉽게 쓸수 있도록 조선인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표현했다고 한다. 시골에는 약이 부족해 주변에서 나는 약을 써야 하는데 그게 어떤 약인지 모르기 때문에 시골 사람들이 부루는 약초 이름을 사용한 것과, 또 인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해 질병 이전에 사람이라는 근본을 보도록 가르친 내용들을 보면 그가 국민의 건강과 정신을 책임지고 그들을 많이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서자로 태어나 엄청난 출세 길에 오른 허준은,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며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임진왜란 공신 책봉에서 3등에 책정되며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으나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유배됐다가 돌아온 뒤에는 권세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조용히 삶을 마쳤다. 이를 보면, 의관 허준은 매우 극적인 삶을 살았고, 그의 출세는 조선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주변 양반들의 수많은 시기 질투 모함이 있었겠지만 이는 오로지 그의 의술과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을 것이다. 허준은 어려서부터 총민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해 경전과 사서에 두루 밝았고 의학에는 더욱 정통했으며, 서자출신임에도 기죽어지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기의 권한을 행사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을 보고 그의 머리가 좋고 행동과 판단이 빠르며 지식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의 목표에 대한 열정과 다소 과감하고 솔직했던 행동, 사고방식은 꼭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오래전부터 동의보감이란 책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큰 관심이 없어서 무슨 내용인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디에 쓰이는지 알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수업시간에 하는 동의보감 수업을 이해해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선정했다. 역사와 관련된 지식이 전혀 없어서, 읽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내용이 많아 참 많이 힘들었고, 수업 때 들었던 내용들이 나와서 그 부분은 약간의 흥미로 읽었지만 모르는 내용을 찾아보고 검색해보며 이해하느라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동의보감은 동아시아와 세계의학사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평가를 받는데, 내가 아직 그 가치를 잘 몰라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선의 의학을 알고 한의사로서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허준의 동의보감을 정복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환경에 인구밀집 현상으로 다양하고 더 강력한 전염병이 발생했고 우리는 이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는데, 예전에는 이러한 전염병 및 역병이 돌면 어떻게 대처 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허준이 살았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은 잦은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시기였으며, 이상 기후 현상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역병이 창궐하면 나라에서는 아주 기민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처럼 일반인들이 병원을 쉽게 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나라 차원에서 의사를 파견해서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역병 대처 방법을 보고 생각이 든 것이 있다. 지금은 기후가 변했고 먹는 음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분명히 예전의 치료법이 현재의 병에 그대로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으로 질환을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전체의 문제로 보고 행동해야 하며, 끊임없이 신속하게 연구를 하고 모든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면 빠른 시간 내에 질병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통섭’은 ‘학문간 장벽을 뛰어 넘은 지식의 대통합’을 주장하는 책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책의 주제를 “본유의 통일성”이라고 밝히며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룬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인과 설명들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인간 지식이 본래 통일성을 가진다는 전망을 제시하고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모든 지식인이 서로 협력하여 외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해 21세기 지식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이 책은 통섭 세계관에 따른 학문의 기초를 세우는 데 무게를 싣는다. 우선 물리 화학 생물학 등 기초과학과 철학 종교 사회학 계몽주의 사상사 등 인문·사회과학의 각 분과학문을 관통하는 핵심부터 잡고, 이후 학문간 통합을 막는 자연과학자와 인문·사회과학자의 대립, 몸과 마음의 이분법, 윤리 규준에 대한 경험론자와 초월론자의 논쟁, 유물론자와 유신론자들의 적대 등을 짚고 양자의 종합을 모색하고 있다.
윌슨은 과학, 인문학과 예술이 사실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리된 각 학문의 세세한 부분을 체계화시키는 데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모든 탐구자에게 그저 보여지는 상태뿐만이 아닌 깊이 숨겨진 세상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간단한 자연의 법칙들로 설명하고자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반대방향으로 연구하지만 오히려 환원주의에서 추구하는 것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통섭은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 이론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본질적 질서를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관점은 그리스시대에는 하나였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 점차 분화되어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각 지식의 분야들은 각각의 연구 분야의 활동에서 얻어진 사실들에 기반하고 연구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들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연구 분야의 활동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예를 들어 원자물리학은 화학과 관련이 깊으며 화학은 또한 생물학과 관련이 깊다.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 또한 신경과학이나 사회학,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다양한 접합과 연관은 여러 분야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다.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엄격하게 그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존중해주지 않는 것 같다. 학문의 구획이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학문이란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그 때 그 때 편의대로 만든 것이다. 진리는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학문의 울타리 안에 갇혀 진리의 한 부분만을 붙들고 평생 씨름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진리의 행보를 따라 과감히 그리고 자유롭게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세계화는 진리를 추적하는 학문의 영역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21세기에 들어서며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통합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고 한다. 책에서 나온 설명한 것처럼 생물학은 생물의 거의 모든 걸 두루 연구하는 박물학, 즉 자연사에 대한 연구로 시작한 학문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발생학이 생물학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를 잡는다. 유전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멘델의 연구가 재발견되고 분자생물학적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는 동안 자연사는 꾸준히 넓은 의미의 생태학 또는 야외생물학으로 발전해왔고, 최근에 들어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띤 진화발생생물학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이제는 과감히 그리고 자유롭게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의 실로 서 말의 구슬을 꿰는 범학문적 접근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지 못하고 좀 의문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다. 통섭이 지닌 과학 환원주의적 위험성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윌슨의 통섭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물리적 법칙으로 단순화시키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옮긴 최 교수는 ‘지식의 대통합’이라 했지만 ‘과학으로 모든 학문을 통치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른다는 윌슨과 최재천 교수의 통섭은 거의 전적으로 그들이 구축한 사회생물학의 관점에서만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며 인문학과 만나려고 한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그들이 주로 연구하는 분야가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보니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기준은 그의 논적이었던 굴드와 그 밖의 다른 생물학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신경세포의 연결망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라면 이 세계를 수많은 개체의 연결망으로 볼 가능성이 높고, 체내 환경과 체외 환경을 중재하는 면역계를 연구하는 면역학자는 생명 과정을 나에 속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생성되고 변화하는 관계로 파악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진화생물학에서 발견된 사실들은 인간 사회로 쉽게 번역되지만, 신경학이나 면역학의 사실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다. 진화생물학은 개체 생명을 다루지만, 신경학과 면역학은 개체 내부의 미시적 현상을 다루므로 거시 세계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들의 의미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는 시도들이 활발한 것도 사실이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주로 동물 세계에서 발견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이들 연구에서는 주로 인문학의 시선으로 과학적 사실을 ‘해석’하고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진정한 지식의 대통합을 위해서는 삶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이 모순 없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반성을 거친 과학, 과학적 사실을 녹여낸 인문학, 그리고 그 둘의 자유로운 소통이 학문 통합의 전제 조건일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인문학은 과학의 장식품으로 전락하거나 또다시 각각의 분할된 상아탑에 자신들을 가두어버릴 것이며, 과학 또한 사람이 아닌 자본과 권력에 봉사하는 도구적 지성으로 타락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배적 담론을 꿈꾸기 전에 먼저 과학과 인문학이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사물에 널리 통한다’는 통섭보다는 ‘언뜻 보기에 서로 어긋나는 뜻이나 주장을 해석하여 조화롭게 한다’는 의미가 더 우선이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나친 세분화로 점점 파편화되는 지식추구에 대한 반성은 필연적으로 지난날들과는 다른 방향에서의 지식활동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분과학문이나 전문분야의 독자적인 연구나 탐구로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위기의식이 공유되는 것. 분석의 시대를 넘어 종합의 시대를 맞아, 과거와는 다른 방법으로 전문성을 기르는 방법이 다각적으로 모색되고 있다. 한 우물을 파되 자신이 판 우물에 스스로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깊게 파되 주변 전공분야와의 다양한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깊이 있는 통찰력과 함께 폭넓은 안목과 식견을 동시에 가져야 된다는 문제의식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전문분야별로 파편화된 지식을 융합, 다른 전공 분야와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통합적인 안목을 겸비한 전문가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현실이다. 세부적으로 쪼개진 협소한 지식에서 벗어나 다른 분야와 소통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도전과제가 아닐 수 없다. 통섭은 국내에서 융합이라는 뜻을 지닌 보편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통섭’이라는 말처럼 흔해진 단어도 없는 듯하다. 통섭 개념의 수사학적 아름다움에 도취돼 이것저것 아무거나 섞으면 통섭이라는 식의 착각과 오해가 횡행하고 있다. 통섭이란 큰 줄기를 잡다, 즉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뜻이다. 윌슨의 본래 문제의식은 생물학을 중심으로 다른 학문을 대통합하겠다는 의도였다. 일종의 생물학적 통섭이며, 생물학으로 학문을 통합하려는 환원주의적 통섭이었다. 그러나 지식의 대통합은 이루어졌는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 따져 물어보면 학문적 다양성을 굳이 하나의 학문으로 통합할 필요성이 있을까? 어떤 철학자는 “실재는 하나지만, 그에 대한 기술은 여럿이고 여럿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다른 수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피력한 바 있다. 통섭이 본래 지향했던 ‘지식의 대통합’보다는 다학문적 협동연구나 다학제적 연구로 오용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처럼 윌슨이 주장한 통섭은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현실적으로 오해되고 오용되어 온 것 같다. 융합이나 통합 등의 통상적 의미를 뜻하는 신조어로 인식하면서 용어 자체가 주는 신선함과 새로움에 끌리는 현상으로 부터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통섭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재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는 물론 실제적으로 이렇다할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벽을 허물고 학문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두루 통하려고 했던 통섭은 결국 서로 간에 말만 앞선 통증만 남기고 말았다. 다른 학문적 영역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원활한 ‘소통’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각자 자기 전공에 대한 강한 옹호와 타 분야에 대한 낮은 관심으로 서로 간에 소리 높여 ‘호통’을 치다보니 ‘불통’되고 울화통이 터지는 형세가 된 셈인 것이다. 한 가지 분야만 깊이 있게 아는 전문성에 대한 한계와 문제점이 제기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지식의 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관점으로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통섭에 대한 학문적 논의와는 다르게 실제적으로는 자기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성을 기본으로 자기 분야와는 다른 분야를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한 가지 전문성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을 학문적 경계 넘나들기나 지식융합을 통해 보다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려는 실제적인 접근으로 논의가 귀착되고 있다. 결국 통섭은 학문적 이상으로 제시된 개념이지만 현실적으로 학문적 접목이나 융합을 통해 인식지평의 확대나 인식 깊이의 심화로 그 의미가 변화되어 사용되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통섭은 하나의 이상으로 남아있고 현실은 통섭과는 거리가 먼 융합적 안목이나 접근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고 이전과 다른 설명력과 이해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통섭의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분야가 다른 학문간 공감과 소통, 융합과 창조가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될 사항은 자기 학문 우월주의와 타 분야에 대한 무관심이다. 인문학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과학자들, 과학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인문학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상대에게 내 지식을 가르치겠다는 교사의 태도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하고 한다. 학문 분야 간에는 우열이 있는 게 아니라 인식과 관심이 다르고 수준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포섭하거나 통섭하기보다 각각의 전문성으로 상대의 한계와 문제점을 보완해주는 호혜적 관계가 존재할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융합은 분야가 다른 전공이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면서 한 가지 틀에 갇힌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한 분야가 다른 분야의 밖에서 지적 자극을 주고 가르치고 또 때로는 위치가 역전되어 가르치고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융합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의미의 지식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분야가 전혀 다른 이질적 학문분야를 어느 하나의 학문분야로 통섭하려는 노력보다 현실적인 대안은 각각의 학문분야가 추구하는 목적과 문제의식을 존중하고 주어진 현상을 보다 다양한 관점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식관심의 차원을 달리하거나 궁합이 맞지 않는 아무거나 이것저것 섞으면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뚜렷한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을 기반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지식의 원형과 큰 그림을 그릴 때 비로소 차원이 다른 새로운 지식이 창조되는 것이다. 전공의 틀에 갇힌 사고를 해서는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통찰력을 얻기가 어렵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지금 몸담고 있는 영역 밖으로 나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경계를 넘어야 경계 밖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은 우리 사회에 가르쳐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지평융합은 단순한 합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이 보다 고차적이고 명료화된 관점으로 종합되는 것과 같은 헤겔적인 의미의 변증법적 종합의 개념이다. 이질적이고 친숙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한 차원 고양시키는 도야의 과정인 지평융합은 분야가 다른 전문 분야 간 지식을 융합할 수 있는 수평적 사고방식의 단서를 제공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