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모든 것에 대해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자세하게 보여주는 이 책은 식물에 관련된 여러 신화에 대해 소개하고, 식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도 제시하고 있다. 식물에 대해 다룬다기보다, 식물에 대한 인식의 역사를 다룬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식물의 역사로 식물 자체만을 두고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었고, 식물을 이런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선했다. 식물이 없다면 어떤 음식물도, 어떤 동물도, 어떤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이해하면서, 최초의 지구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 조류의 탄생과 식물의 진화, 생명체를 가능하게 한 광합성 작용, 식물의 교묘한 생존 전력과 뛰어난 적응력, 식물이 지닌 숨겨진 정중동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자크 브로스는 수목학과 신화학을 아우르는 풍부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선사시대 이래 인간과 식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려준다. 태고 적부터 인간은 탄생과 죽음, 부활을 반복하는 식물에 대해 경외심을 지녔다. 하지만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은 식물의 신성한 의미를 잊어버렸으며, 그 결과 인간과 식물의 조화가 깨어지고, 인류는 각종 환경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제야 식물이야말로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또한 예전부터 내려오던 식물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믿음은 엄정한 과학주의가 판치던 시기에 미신으로 치부되어 무시되었지만 현대 과학에 의해 다시금 입증되기도 했다. 이 책은 약간은 지루했지만, 식물에 얽힌 종교적, 신화적 의미를 통해 인간과 식물이 함께해온 기나긴 역사와 식물의 능력을 접하면서, 식물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시야를 얻을 수 있었고, 식물에 대한 사랑과 공경의 자세를 곳곳에서 느끼고 식물과 인간은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육체가 지닌 궁극적인 목적은 식물세계의 번성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 책의 에너지 효율 측면이나 여러 가지 환경에의 적응 측면에서 동물보다 식물이 월등하게 우수한 생명체라는 주장은 식물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식물도 생존경쟁이 치열하고 개체마다의 생존의 법칙을 갖고 있으며 그 법칙을 발전시켜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식물은 그들의 번성에 동물은 물론, 인간을 활용하기도 한다. 식물이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자신의 생존과 번식 욕구를 충족해 왔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과연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최종소비자가 맞는지 고민해보고 새로운 관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잠시 입장을 바꾸어 식물의 위치에서 먹이사슬을 그린다면 당연히 그 정점에는 식물이 자리할 것이다. 결국 지구상의 먹이사슬은 단선적이 아니라 순환적인 구조로 상호 연결되어 있어서, 지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식물과 동물과 인간은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존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현대인의 식물에 대한 이해는 식물을 자원으로 이용하는 데 있어서 그 깊이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 폭은 오히려 훨씬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옛날 원시인들이 어떻게 차, 커피, 카카오, 콜라열매, 파라과이차 등 카페인을 함유하고 있는 다섯 가지 식물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또 카페인 성분이 피로를 몰아낸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서구의 근대 또는 현대 문명이 이해하지 못했던, 우리가 원시인이라고 부르는 선조들의 식물에 대한 광범위하고 기초적이지만 상세한 지혜와 지식에 대한 탐구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어떻게 우리가 자랑하는 현대 문명이 그 많은 실험과 연구 끝에 간신히 알아낸 식물들에 관한 지식을 알아내고 활용할 수 있었을까. 현대인들이 상실한 식물들과 사람들 간의 교감 능력이 그 답일 것이다. 식물은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한만큼, 식물을 연구하여 식물과 무생물 생물 나아가 인간까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식물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고 무관심했던, 식물에 대한 정보와 신화를 읽으면서. 생명과 식물을 사랑하고 환경에 대한 인간의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은 이 책에 덧붙일 수 있는 소중한 미덕인 것 같다. 우리의 고정 관념과 상식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을 서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루면서 분리하지만, 실제 적지 않은 실험과 사례는 우리가 가진 상식과 많이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오만함과 자연에 대한 파괴행위로 더 이상 지구의 생명체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모두가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남기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꾸려면 있는 그대로의 생명,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생명 그대로를 사랑하고, 적어도 존중할 수는 있어야 한다.
‘통섭’은 ‘학문간 장벽을 뛰어 넘은 지식의 대통합’을 주장하는 책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책의 주제를 “본유의 통일성”이라고 밝히며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룬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인과 설명들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인간 지식이 본래 통일성을 가진다는 전망을 제시하고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모든 지식인이 서로 협력하여 외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해 21세기 지식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이 책은 통섭 세계관에 따른 학문의 기초를 세우는 데 무게를 싣는다. 우선 물리 화학 생물학 등 기초과학과 철학 종교 사회학 계몽주의 사상사 등 인문·사회과학의 각 분과학문을 관통하는 핵심부터 잡고, 이후 학문간 통합을 막는 자연과학자와 인문·사회과학자의 대립, 몸과 마음의 이분법, 윤리 규준에 대한 경험론자와 초월론자의 논쟁, 유물론자와 유신론자들의 적대 등을 짚고 양자의 종합을 모색하고 있다.
윌슨은 과학, 인문학과 예술이 사실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리된 각 학문의 세세한 부분을 체계화시키는 데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모든 탐구자에게 그저 보여지는 상태뿐만이 아닌 깊이 숨겨진 세상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간단한 자연의 법칙들로 설명하고자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반대방향으로 연구하지만 오히려 환원주의에서 추구하는 것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통섭은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 이론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본질적 질서를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관점은 그리스시대에는 하나였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 점차 분화되어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각 지식의 분야들은 각각의 연구 분야의 활동에서 얻어진 사실들에 기반하고 연구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들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연구 분야의 활동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예를 들어 원자물리학은 화학과 관련이 깊으며 화학은 또한 생물학과 관련이 깊다.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 또한 신경과학이나 사회학,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다양한 접합과 연관은 여러 분야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다.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엄격하게 그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존중해주지 않는 것 같다. 학문의 구획이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학문이란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그 때 그 때 편의대로 만든 것이다. 진리는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학문의 울타리 안에 갇혀 진리의 한 부분만을 붙들고 평생 씨름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진리의 행보를 따라 과감히 그리고 자유롭게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세계화는 진리를 추적하는 학문의 영역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21세기에 들어서며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통합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고 한다. 책에서 나온 설명한 것처럼 생물학은 생물의 거의 모든 걸 두루 연구하는 박물학, 즉 자연사에 대한 연구로 시작한 학문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발생학이 생물학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를 잡는다. 유전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멘델의 연구가 재발견되고 분자생물학적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는 동안 자연사는 꾸준히 넓은 의미의 생태학 또는 야외생물학으로 발전해왔고, 최근에 들어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띤 진화발생생물학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이제는 과감히 그리고 자유롭게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의 실로 서 말의 구슬을 꿰는 범학문적 접근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지 못하고 좀 의문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다. 통섭이 지닌 과학 환원주의적 위험성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윌슨의 통섭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물리적 법칙으로 단순화시키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옮긴 최 교수는 ‘지식의 대통합’이라 했지만 ‘과학으로 모든 학문을 통치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른다는 윌슨과 최재천 교수의 통섭은 거의 전적으로 그들이 구축한 사회생물학의 관점에서만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며 인문학과 만나려고 한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그들이 주로 연구하는 분야가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보니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기준은 그의 논적이었던 굴드와 그 밖의 다른 생물학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신경세포의 연결망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라면 이 세계를 수많은 개체의 연결망으로 볼 가능성이 높고, 체내 환경과 체외 환경을 중재하는 면역계를 연구하는 면역학자는 생명 과정을 나에 속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생성되고 변화하는 관계로 파악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진화생물학에서 발견된 사실들은 인간 사회로 쉽게 번역되지만, 신경학이나 면역학의 사실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다. 진화생물학은 개체 생명을 다루지만, 신경학과 면역학은 개체 내부의 미시적 현상을 다루므로 거시 세계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들의 의미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는 시도들이 활발한 것도 사실이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주로 동물 세계에서 발견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이들 연구에서는 주로 인문학의 시선으로 과학적 사실을 ‘해석’하고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진정한 지식의 대통합을 위해서는 삶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이 모순 없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반성을 거친 과학, 과학적 사실을 녹여낸 인문학, 그리고 그 둘의 자유로운 소통이 학문 통합의 전제 조건일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인문학은 과학의 장식품으로 전락하거나 또다시 각각의 분할된 상아탑에 자신들을 가두어버릴 것이며, 과학 또한 사람이 아닌 자본과 권력에 봉사하는 도구적 지성으로 타락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배적 담론을 꿈꾸기 전에 먼저 과학과 인문학이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사물에 널리 통한다’는 통섭보다는 ‘언뜻 보기에 서로 어긋나는 뜻이나 주장을 해석하여 조화롭게 한다’는 의미가 더 우선이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나친 세분화로 점점 파편화되는 지식추구에 대한 반성은 필연적으로 지난날들과는 다른 방향에서의 지식활동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분과학문이나 전문분야의 독자적인 연구나 탐구로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위기의식이 공유되는 것. 분석의 시대를 넘어 종합의 시대를 맞아, 과거와는 다른 방법으로 전문성을 기르는 방법이 다각적으로 모색되고 있다. 한 우물을 파되 자신이 판 우물에 스스로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깊게 파되 주변 전공분야와의 다양한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깊이 있는 통찰력과 함께 폭넓은 안목과 식견을 동시에 가져야 된다는 문제의식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전문분야별로 파편화된 지식을 융합, 다른 전공 분야와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통합적인 안목을 겸비한 전문가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현실이다. 세부적으로 쪼개진 협소한 지식에서 벗어나 다른 분야와 소통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도전과제가 아닐 수 없다. 통섭은 국내에서 융합이라는 뜻을 지닌 보편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통섭’이라는 말처럼 흔해진 단어도 없는 듯하다. 통섭 개념의 수사학적 아름다움에 도취돼 이것저것 아무거나 섞으면 통섭이라는 식의 착각과 오해가 횡행하고 있다. 통섭이란 큰 줄기를 잡다, 즉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뜻이다. 윌슨의 본래 문제의식은 생물학을 중심으로 다른 학문을 대통합하겠다는 의도였다. 일종의 생물학적 통섭이며, 생물학으로 학문을 통합하려는 환원주의적 통섭이었다. 그러나 지식의 대통합은 이루어졌는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 따져 물어보면 학문적 다양성을 굳이 하나의 학문으로 통합할 필요성이 있을까? 어떤 철학자는 “실재는 하나지만, 그에 대한 기술은 여럿이고 여럿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다른 수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피력한 바 있다. 통섭이 본래 지향했던 ‘지식의 대통합’보다는 다학문적 협동연구나 다학제적 연구로 오용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처럼 윌슨이 주장한 통섭은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현실적으로 오해되고 오용되어 온 것 같다. 융합이나 통합 등의 통상적 의미를 뜻하는 신조어로 인식하면서 용어 자체가 주는 신선함과 새로움에 끌리는 현상으로 부터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통섭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재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는 물론 실제적으로 이렇다할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벽을 허물고 학문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두루 통하려고 했던 통섭은 결국 서로 간에 말만 앞선 통증만 남기고 말았다. 다른 학문적 영역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원활한 ‘소통’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각자 자기 전공에 대한 강한 옹호와 타 분야에 대한 낮은 관심으로 서로 간에 소리 높여 ‘호통’을 치다보니 ‘불통’되고 울화통이 터지는 형세가 된 셈인 것이다. 한 가지 분야만 깊이 있게 아는 전문성에 대한 한계와 문제점이 제기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지식의 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관점으로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통섭에 대한 학문적 논의와는 다르게 실제적으로는 자기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성을 기본으로 자기 분야와는 다른 분야를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한 가지 전문성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을 학문적 경계 넘나들기나 지식융합을 통해 보다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려는 실제적인 접근으로 논의가 귀착되고 있다. 결국 통섭은 학문적 이상으로 제시된 개념이지만 현실적으로 학문적 접목이나 융합을 통해 인식지평의 확대나 인식 깊이의 심화로 그 의미가 변화되어 사용되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통섭은 하나의 이상으로 남아있고 현실은 통섭과는 거리가 먼 융합적 안목이나 접근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고 이전과 다른 설명력과 이해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통섭의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분야가 다른 학문간 공감과 소통, 융합과 창조가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될 사항은 자기 학문 우월주의와 타 분야에 대한 무관심이다. 인문학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과학자들, 과학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인문학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상대에게 내 지식을 가르치겠다는 교사의 태도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하고 한다. 학문 분야 간에는 우열이 있는 게 아니라 인식과 관심이 다르고 수준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포섭하거나 통섭하기보다 각각의 전문성으로 상대의 한계와 문제점을 보완해주는 호혜적 관계가 존재할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융합은 분야가 다른 전공이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면서 한 가지 틀에 갇힌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한 분야가 다른 분야의 밖에서 지적 자극을 주고 가르치고 또 때로는 위치가 역전되어 가르치고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융합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의미의 지식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분야가 전혀 다른 이질적 학문분야를 어느 하나의 학문분야로 통섭하려는 노력보다 현실적인 대안은 각각의 학문분야가 추구하는 목적과 문제의식을 존중하고 주어진 현상을 보다 다양한 관점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식관심의 차원을 달리하거나 궁합이 맞지 않는 아무거나 이것저것 섞으면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뚜렷한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을 기반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지식의 원형과 큰 그림을 그릴 때 비로소 차원이 다른 새로운 지식이 창조되는 것이다. 전공의 틀에 갇힌 사고를 해서는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통찰력을 얻기가 어렵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지금 몸담고 있는 영역 밖으로 나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경계를 넘어야 경계 밖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은 우리 사회에 가르쳐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지평융합은 단순한 합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이 보다 고차적이고 명료화된 관점으로 종합되는 것과 같은 헤겔적인 의미의 변증법적 종합의 개념이다. 이질적이고 친숙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한 차원 고양시키는 도야의 과정인 지평융합은 분야가 다른 전문 분야 간 지식을 융합할 수 있는 수평적 사고방식의 단서를 제공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