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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대통합: 통섭을 읽고]/지식의대통합/에드워드 윌슨/최재천/사이언스 북스/

통섭학문간 장벽을 뛰어 넘은 지식의 대통합을 주장하는 책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책의 주제를 본유의 통일성이라고 밝히며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룬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인과 설명들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인간 지식이 본래 통일성을 가진다는 전망을 제시하고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모든 지식인이 서로 협력하여 외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해 21세기 지식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이 책은 통섭 세계관에 따른 학문의 기초를 세우는 데 무게를 싣는다. 우선 물리 화학 생물학 등 기초과학과 철학 종교 사회학 계몽주의 사상사 등 인문·사회과학의 각 분과학문을 관통하는 핵심부터 잡고, 이후 학문간 통합을 막는 자연과학자와 인문·사회과학자의 대립, 몸과 마음의 이분법, 윤리 규준에 대한 경험론자와 초월론자의 논쟁, 유물론자와 유신론자들의 적대 등을 짚고 양자의 종합을 모색하고 있다.

윌슨은 과학, 인문학과 예술이 사실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리된 각 학문의 세세한 부분을 체계화시키는 데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모든 탐구자에게 그저 보여지는 상태뿐만이 아닌 깊이 숨겨진 세상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간단한 자연의 법칙들로 설명하고자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반대방향으로 연구하지만 오히려 환원주의에서 추구하는 것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통섭은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 이론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본질적 질서를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관점은 그리스시대에는 하나였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 점차 분화되어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각 지식의 분야들은 각각의 연구 분야의 활동에서 얻어진 사실들에 기반하고 연구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들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연구 분야의 활동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예를 들어 원자물리학은 화학과 관련이 깊으며 화학은 또한 생물학과 관련이 깊다.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 또한 신경과학이나 사회학,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다양한 접합과 연관은 여러 분야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다.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엄격하게 그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존중해주지 않는 것 같다. 학문의 구획이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학문이란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그 때 그 때 편의대로 만든 것이다. 진리는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학문의 울타리 안에 갇혀 진리의 한 부분만을 붙들고 평생 씨름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진리의 행보를 따라 과감히 그리고 자유롭게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세계화는 진리를 추적하는 학문의 영역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21세기에 들어서며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통합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고 한다. 책에서 나온 설명한 것처럼 생물학은 생물의 거의 모든 걸 두루 연구하는 박물학, 즉 자연사에 대한 연구로 시작한 학문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발생학이 생물학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를 잡는다. 유전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멘델의 연구가 재발견되고 분자생물학적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는 동안 자연사는 꾸준히 넓은 의미의 생태학 또는 야외생물학으로 발전해왔고, 최근에 들어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띤 진화발생생물학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이제는 과감히 그리고 자유롭게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의 실로 서 말의 구슬을 꿰는 범학문적 접근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지 못하고 좀 의문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다. 통섭이 지닌 과학 환원주의적 위험성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윌슨의 통섭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물리적 법칙으로 단순화시키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옮긴 최 교수는 지식의 대통합이라 했지만 과학으로 모든 학문을 통치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른다는 윌슨과 최재천 교수의 통섭은 거의 전적으로 그들이 구축한 사회생물학의 관점에서만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며 인문학과 만나려고 한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그들이 주로 연구하는 분야가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보니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기준은 그의 논적이었던 굴드와 그 밖의 다른 생물학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신경세포의 연결망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라면 이 세계를 수많은 개체의 연결망으로 볼 가능성이 높고, 체내 환경과 체외 환경을 중재하는 면역계를 연구하는 면역학자는 생명 과정을 나에 속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생성되고 변화하는 관계로 파악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진화생물학에서 발견된 사실들은 인간 사회로 쉽게 번역되지만, 신경학이나 면역학의 사실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다. 진화생물학은 개체 생명을 다루지만, 신경학과 면역학은 개체 내부의 미시적 현상을 다루므로 거시 세계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들의 의미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는 시도들이 활발한 것도 사실이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주로 동물 세계에서 발견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이들 연구에서는 주로 인문학의 시선으로 과학적 사실을 해석하고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진정한 지식의 대통합을 위해서는 삶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이 모순 없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반성을 거친 과학, 과학적 사실을 녹여낸 인문학, 그리고 그 둘의 자유로운 소통이 학문 통합의 전제 조건일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인문학은 과학의 장식품으로 전락하거나 또다시 각각의 분할된 상아탑에 자신들을 가두어버릴 것이며, 과학 또한 사람이 아닌 자본과 권력에 봉사하는 도구적 지성으로 타락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배적 담론을 꿈꾸기 전에 먼저 과학과 인문학이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사물에 널리 통한다는 통섭보다는 언뜻 보기에 서로 어긋나는 뜻이나 주장을 해석하여 조화롭게 한다는 의미가 더 우선이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나친 세분화로 점점 파편화되는 지식추구에 대한 반성은 필연적으로 지난날들과는 다른 방향에서의 지식활동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분과학문이나 전문분야의 독자적인 연구나 탐구로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위기의식이 공유되는 것. 분석의 시대를 넘어 종합의 시대를 맞아, 과거와는 다른 방법으로 전문성을 기르는 방법이 다각적으로 모색되고 있다. 한 우물을 파되 자신이 판 우물에 스스로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깊게 파되 주변 전공분야와의 다양한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깊이 있는 통찰력과 함께 폭넓은 안목과 식견을 동시에 가져야 된다는 문제의식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전문분야별로 파편화된 지식을 융합, 다른 전공 분야와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통합적인 안목을 겸비한 전문가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현실이다. 세부적으로 쪼개진 협소한 지식에서 벗어나 다른 분야와 소통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도전과제가 아닐 수 없다. 통섭은 국내에서 융합이라는 뜻을 지닌 보편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통섭이라는 말처럼 흔해진 단어도 없는 듯하다. 통섭 개념의 수사학적 아름다움에 도취돼 이것저것 아무거나 섞으면 통섭이라는 식의 착각과 오해가 횡행하고 있다. 통섭이란 큰 줄기를 잡다, 즉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뜻이다. 윌슨의 본래 문제의식은 생물학을 중심으로 다른 학문을 대통합하겠다는 의도였다. 일종의 생물학적 통섭이며, 생물학으로 학문을 통합하려는 환원주의적 통섭이었다. 그러나 지식의 대통합은 이루어졌는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 따져 물어보면 학문적 다양성을 굳이 하나의 학문으로 통합할 필요성이 있을까? 어떤 철학자는 실재는 하나지만, 그에 대한 기술은 여럿이고 여럿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다른 수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피력한 바 있다. 통섭이 본래 지향했던 지식의 대통합보다는 다학문적 협동연구나 다학제적 연구로 오용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처럼 윌슨이 주장한 통섭은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현실적으로 오해되고 오용되어 온 것 같다. 융합이나 통합 등의 통상적 의미를 뜻하는 신조어로 인식하면서 용어 자체가 주는 신선함과 새로움에 끌리는 현상으로 부터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통섭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재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는 물론 실제적으로 이렇다할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벽을 허물고 학문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두루 통하려고 했던 통섭은 결국 서로 간에 말만 앞선 통증만 남기고 말았다. 다른 학문적 영역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원활한 소통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각자 자기 전공에 대한 강한 옹호와 타 분야에 대한 낮은 관심으로 서로 간에 소리 높여 호통을 치다보니 불통되고 울화통이 터지는 형세가 된 셈인 것이다. 한 가지 분야만 깊이 있게 아는 전문성에 대한 한계와 문제점이 제기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지식의 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관점으로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통섭에 대한 학문적 논의와는 다르게 실제적으로는 자기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성을 기본으로 자기 분야와는 다른 분야를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한 가지 전문성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을 학문적 경계 넘나들기나 지식융합을 통해 보다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려는 실제적인 접근으로 논의가 귀착되고 있다. 결국 통섭은 학문적 이상으로 제시된 개념이지만 현실적으로 학문적 접목이나 융합을 통해 인식지평의 확대나 인식 깊이의 심화로 그 의미가 변화되어 사용되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통섭은 하나의 이상으로 남아있고 현실은 통섭과는 거리가 먼 융합적 안목이나 접근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고 이전과 다른 설명력과 이해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통섭의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분야가 다른 학문간 공감과 소통, 융합과 창조가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될 사항은 자기 학문 우월주의와 타 분야에 대한 무관심이다. 인문학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과학자들, 과학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인문학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상대에게 내 지식을 가르치겠다는 교사의 태도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하고 한다. 학문 분야 간에는 우열이 있는 게 아니라 인식과 관심이 다르고 수준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포섭하거나 통섭하기보다 각각의 전문성으로 상대의 한계와 문제점을 보완해주는 호혜적 관계가 존재할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융합은 분야가 다른 전공이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면서 한 가지 틀에 갇힌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한 분야가 다른 분야의 밖에서 지적 자극을 주고 가르치고 또 때로는 위치가 역전되어 가르치고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융합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의미의 지식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분야가 전혀 다른 이질적 학문분야를 어느 하나의 학문분야로 통섭하려는 노력보다 현실적인 대안은 각각의 학문분야가 추구하는 목적과 문제의식을 존중하고 주어진 현상을 보다 다양한 관점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식관심의 차원을 달리하거나 궁합이 맞지 않는 아무거나 이것저것 섞으면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뚜렷한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을 기반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지식의 원형과 큰 그림을 그릴 때 비로소 차원이 다른 새로운 지식이 창조되는 것이다. 전공의 틀에 갇힌 사고를 해서는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통찰력을 얻기가 어렵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지금 몸담고 있는 영역 밖으로 나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경계를 넘어야 경계 밖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은 우리 사회에 가르쳐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지평융합은 단순한 합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이 보다 고차적이고 명료화된 관점으로 종합되는 것과 같은 헤겔적인 의미의 변증법적 종합의 개념이다. 이질적이고 친숙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한 차원 고양시키는 도야의 과정인 지평융합은 분야가 다른 전문 분야 간 지식을 융합할 수 있는 수평적 사고방식의 단서를 제공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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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의학]을 읽고 독후감/불량의학/크리스토퍼완제크/박은영/열대림/

의학 상식의 치명적 오류와 맹점을 고발하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과거에는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했으나, 오히려 건강에 불이익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수많은 인터넷 자료가 뒤섞이면서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이게 좋다고 했었나, 아니었나?’ 계속 의문이 들고 결국은 과거에 했던 행동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행동 판단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에 검색을 하려고 해도 그 정보가 언제 나온 자료인지 확인을 할 수 없고, 여러 불확실한 정보가 뒤섞여서 결국 포기하게 되는 과정은 비전문가인들에게는 익숙한 현실이다.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서 문제가 생기는 음식물들도 많고, 유전자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백신의 부작용도 존재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블로그 같은 여러 사람들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논란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정보를 믿어야 할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정보의 출처가 확실하게 공개가 되지 않기도 하고, 요즘에는 정보생산 기능을 누구나 가능해졌기 때문에 사람별로 케이스가 다른데도 모두에게 적용되는 새로운 사실인 마냥 공개되어,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A정보와 B정도가 상충되어 무엇을 믿을지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얼마 전에 한동안 유행했던 육류 다이어트. 원푸드 다이어트, 고지방 다이어트 들이 바로 그 근거가 된다. 모든 정보마다 출처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하지 않는 이상, 이제는 어떠한 정보도 믿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심지어 전문가들이 공개하는 연구들조차 전제조건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결과의 차이로 상충되는 결과들이 많아 이제는 전문가 집단의 연구조차 믿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들곤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이 사람이 쓴 글을 정말 100%믿고 신뢰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로도 말이다. 너무나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얽혀져 있다 보니 서로의 주머니를 챙기기 위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억지를 부리면서 문제가 더 악화되는 게 아닌가 생각 한다. 이 책을 재미있게 본 이유 중에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주워들은 개념들이 가짜라고 밝혀짐에도 있었다. 그중 특히 거짓이라고 생각 못해봤던 인간은 뇌의 10%만 사용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 재미있었다. 이 거짓 정보는, 우리가 평생을 10%의 뇌만 사용한다는 말 때문에 나의 잠재의식을 깨우면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하고 더 큰 목표를 꿈 꿀 수 있도록 도와준 장점도 있었다. 나는 이러한 속설을 아인슈타인도 말했고, 수많은 책과 기사와 블로그에서 접했기 때문에 당연히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90%의 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거의 혼수상태나 다름없다는 것임을 알게 된 후, 정말 인간은 정보의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내 눈에 많이 접하고 머릿속에 많이 들어왔던 내용을 사실로 믿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경험하자, 영화에 많이 나오는 장면들이 우리의 무의식속에 잘못된 정보들을 너무나 많이 심어주고 있다는 점을 느끼고 경계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건강의학 정보들을 접하고 몸에 좋다는 기사가 나오면 다음날 마트에선 그 상품이 품절 되는 게 보통이다. 모두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생각 없이 그동안 남이 말한 것들을 믿고 와전시키며 맹목적으로 따라왔던 의학지식들을 다시 되짚어 보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불량의학정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신문과 방송에 종사하는 기자들이 잘못된 의학논문을 이용해 그릇된 기사를 작성하지 않도록 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주제로 한 건강관련 도서들이 출판되지 않도록 법으로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 또한 우수한 의학 도서를 전문가 집단에서 정확하게 판단해서 공개하고, 비과학적 태도의 혼탁한 도서는 분류를 다르게 해야 할 것이다. 의학정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 많은 정보 중에 정확한 정보를 뽑아서 익힐 수 있도록 평가도구를 널리 보급시키는 노력도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한의사가 되어서 의학정보 관련 논문을 제대로 정확하게 읽어보고, 연구방법이 시뢰가 높은 것인지 잘 살펴 연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그릇된 정보로 인해 남들이 어떤 피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면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러한 걱정을 바탕으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틀린 정보를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불량의학정보를 알리고 논의하면서 정보가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도록 전문가 집단이 노력하고 포럼에도 꼭 참가를 하며 좋은 정보를 양산하여 불량정보를 덮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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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유감]과 [메디컬 스캔들]은 개정판이기에 이름만 다를 뿐, 책 내용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의사유감/베르너바르텐스/박정아/알마

메디컬스캔들/베르너바르텐스/박정아/알마

이 책은 독일에서 의사로서 경험을 하면서 혼란스럽고 화가 나게 했던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외국이나 한국이나 문제가 되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학원에서 강사들도 저런 애들이 의사를 한다면 정말 만나고 싶지 않다라고 할 정도로 도덕정신은 형편없는데 공부만 잘한 메디컬 학생들이 많은데, 그런 애들이 환자를 대할 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으로 어떤 말을 할지 굉장히 걱정스럽고 해당 환자가 느끼는 감정에 벌써부터 동정과 미안함이 생긴다.

책에 나오는 사례들을 보면서 과거 내가 겪고 불만을 품었던 경험들이 많이 떠올랐다. 의사가 너무 무능력해서 답답해 미칠 것 같은 경우도 있었고, 우리 가족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은 적도 많았고, 지인의 할머니는 정신 나간 전문의 오진 때문에 10년이나 잘못된 정신과약을 처방 받은 적도 있었다. 전부 자기 책임을 다른 의사와 다른 진료과로 책임을 넘기기 바빴고 바쁜척하기만 하니 의사에 대한 불신만 가득해졌을 뿐이었다. 그저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이라 오진을 하더라도, 환자의 불안감을 이용해 자기 주머니를 채우기 바빴다. 물론 의사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하면서도 환자의 말을 들어주고 같이 걱정한마디 해주고 전에 한 말과 이름을 기억해주는 분들도 있었다. 가벼운 공감 한마디인데 의사에게 신뢰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고, 대기 환자가 정말 많은데도 510분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더라도 재방문율이 상당히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의대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어떻게 해야 환자를 더 많이 오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보니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들이 있다. 전에는 기사를 보며 3분 진료 불만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3분이면 할 것들 다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었었다. 또한 의사의 공감능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왜 필요한가? 가볍게만 생각했지만, 경험을 돌이켜보면 그 짧은 한마디인데도 나의 고통을 알아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호감과 신뢰가 생겼고, 큰 문제만 없다면 그 병원에 다시 방문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아주 무례하고 오만한 의사. 서로의 책임을 미루는 의사, 역겨운 망나니 같은 의사들에게 환멸이 났다. 정말 상당수의 의사만 없었다면 의학은 너무나 훌륭한 학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한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정말 무겁고 무서운 말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정말 쉽지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의학은 완벽하지 않고 인체는 의사의 손안에서 100%마음대로 작동하지 않기에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이처럼 의사가 완전히 온힘을 쏟아서 치료를 했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책에 나온 대로 수술을 게임처럼 의사 간 승부로 생각해 결국 환자를 사망으로 이끈 의사들은 아주 무거운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학적 연구를 위해 환자에게 다른 거짓 이유를 대면서 긴급한 치료를 며칠 미루게 하는 등의 아주 이기적이고 역겨운 인간들은 환자를 돌보는 의사로서의 자질이 한참 부족하다고 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환자를 속이면서 상태를 악화시키는 이들의 무책임하고 소름끼치는 행동을, 치료를 받게 되는 그 환자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보복할 것인지 두렵지도 않은가. 상당수의 의사라는 작자들은 너무 자신의 지위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오직 수소의 의사만이 고된 노동과 집중력으로 신의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을 뿐, 상당수의 의사는 아주 기본적이고 돈이 될 만한 일들만 하는데 오히려 이들의 권위의식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만 있다. 수많은 환자를 봐서인지 원래 그런 인성인지 모르겠지만, 질문을 하면 귀찮아하기도 하고 반말하기도 하고 정말 돈을 벌기 위해 치료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환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행동을 많이 한다. 분명히 환자는 의사를 신뢰할 수 있어야 회복이 빨라지고 치료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장사꾼들에게 과연 환자는 신뢰를 쌓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지금까지 다양한 의사를 만나보고, 내가 나중에 환자의 절박함과 병의 수준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지불능력이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의사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면서, 상인이 되는 의사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의 가치관을 바르게 정립해둬야 한다고 다짐했다. 진심으로 돈만 밝히는 쓰레기 같은 의사가 될 바에는 임상의를 그만두고, 차라리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가를 하는 것이 환자와 나를 위해 좋은 선택이다. 배운 내용을 잘 이해하여 진단을 잘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중요하지만, 감정이입을 하고 사회봉사를 하면서 배려능력을 잃지 않도록 힘쓰는 일도 환자와 나를 위해 필수적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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